존 웨슬리의 회심기념비(commemorating the place of John Wesley, christ church college)[1]

존 웨슬리의 회심기념비(commemorating the place of John Wesley, christ church c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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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가 회심했던 올더스게이트 거리             (출처- http://cafe.daum.net/hccmc/4qdp/)

 

올더스게이트 거리는 영국 상업의 중심지로 세인트 폴 성당 뒤편으로 런던박물관을 정면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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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게이트 거리             (출처- http://cafe.daum.net/hccmc/4q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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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DREW 신학교에서 주장하는 웨슬리 회심 장소 기념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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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DREW 신학교에서 주장하는 웨슬리 회심 장소 기념 동판   (출처-http://blog.daum.net/missiontour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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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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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박물관 웨슬리 회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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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런던 박물관 옆에 위치한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 지금은 그가 거듭남을 체험한 집회장소가 남아 있지 않고, 회심당일(1738년 5월 24일)의 일기를 적은 커다란 불꽃 모양의 동판이 이 곳이 웨슬리의 회심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다. 2003년 3백주년 기념으로 동판을 만든 것이다.  기념비 내용은 회심일의 일기이다. 정확한 회심위치에 대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영국 학자들은 런던박물관 자리를 주장하고 있고 미국 학자들은 30m 정도 거리를 더 올라가 길가에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대학교에서 1926년 8월에 기증한 명판을 설치했다.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죤 웨슬리의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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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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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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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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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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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회심 기념비, 런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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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게이트 표지판, 존 웨슬리 형제 회심기념 터      (출처- http://cafe.daum.net/hccmc/4q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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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하나님은 그의 일꾼을 묻으시지만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 "God buries his Workmen, but carries on his work" 기념비 맨 꼭대기 책에 적혀 있다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 목사를 기념하여 설교자로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열정이 있었고 유능했으며, 많이 배웠으나 자만하지 않고 경건했으나 허식이 없었으며, 다른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아들이었지만, 자만하는 자와, 위선자와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우레의 아들이었다. 그는 감리교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형인 존 웨슬리 목사와 함께 순회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으로서 고난과 박해와 수모를 견뎠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 크게 헌신하여 이 나라에 최초로 감리교 모임들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 시인으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찬송가로 교훈과 위로를 전했다. 그는 1707년 12월 18일에 태어나 1788년 3월 29일에 죽었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고 경건하게 믿었으며, 영국교회의 진실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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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웨슬리가 회심한 John Bray's House

 

촬스는 존 웨슬리보다 3일 앞서 회심하였는데 찰스 웨슬리의 회심장소는 Mr. Bray의 집(John Bray's Hous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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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웨슬리가 회심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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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웨슬리 회심 기념비


1738년 5월 21일, 아픔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안의 런던에서 그는 발견했다. 그와 그의 형 존이 그토록 오래 오래 찾아왔었던 것을 그는 드디어 찾았던 것이다. '나는 찾았다 내 자신이 하나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소망 안에서 기쁨에 넘쳤다.' 수일 내로 그는 찬송가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출한 재능을 발견하였다. 이 회심의 경험 이후 쓴 그의 첫 찬송은 이렇다: -나의 경이로운 영혼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내가 어떻게 내 모두를 하늘에 열망할까요? 한 노예였던 내가 죽음과 죄로부터 구원을 받다니,  영원한 불구덩이에서 불타던 막대기가 꺼내어져 구원을 받다니,  아 어찌하면 그만한 승리의 개가를 다 표현하여 올릴 수 있으리요,  혹은 나의 이 위대한 구세주께 찬양을 어찌다 노래할 수 있으리요? 아무리 찬양을 많이 올린다 해도 그 높으신 구원의 은총에 까지 올라가기란 너무너무 부족하기만한 그 구원의 경이로움이란. 1749년에 42세의 나이로 찰스는 20세의 사라와 결혼하였다. 결혼후 처음 4년 동안 그들은 함께 여행하며, 찰스는 설교했다. 그의 형처럼 전국을 다니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영감이 폭발할 때, 그는 펜! 종이! 펜! 종이! 하며 소리치며 공부방으로 뛰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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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형제 기념우표

 

1999년, 영국에서 지난 천 년을 기념하며 "The Christian's Tale "라는 주제로 기념우표를 만들었는데 그 중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우표이다. 중앙에 "천사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 제목이 보이고 이 찬양이 수록된 찬송가 Hymns and Sacred Poems(1739)  표지, 그리고 웨슬리 예배당 스테인드 글라스, 존 웨슬리가 찰스에게 쓴 편지의 일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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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센트럴 홀


1912년 존 웨슬리를 기념하기위해 세워졌다. 1898년  "감리교 20세기 기금" 이 모아져 세워졌다. 1946년1.10- 2.14 까지  제1차 UN 총회가 열린 장소로 유명하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에는 존 웨슬리의 동상이 서있는데 본래 이 동상은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웨슬리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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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센트럴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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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사원          (출처- http://blog.daum.net/seoulpr7555/690)


"서쪽의대사원"이라는 뜻으로 시 서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회 왕 에드워드 Edward the confessor에 의해 지어졌으며 프랑스에서 온 노르만인 월리엄은 자기가 잉글랜드 왕의 정당한 후 후계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1066년에 여기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후 40명이 넘는 영국의 왕이 차례로 대관식을 거행하는 등 영국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곳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고딕양식의 건물에서는 가늘고 긴 스테인트 글라스가 장관이다.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프랑스식 고딕 양식 본당에서부터 놀랍게 복잡한 헨리 7세의 예배당까지 아주 다양한 건축 양식을 지닌 건물이다. 이곳의 대사원 교회는 10세기에 지어졌지만 현재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고딕 건축양식은 1245년 헨리 3세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되었다. 대관식 교회로서의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대사원은 16세기 중반에 있었던 헨리8세의 영국내 수도원 건물에 대한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궁은 16세기까지 왕이 거처한 궁궐이었는데 바로 길 건너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은 왕실 직속의 특수 교회이다. 이 교회 안에 묻혀 있는 역대 왕만 해도 17명이 넘는다고 한다. 공식 명칭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성 피타교회'요 사람들은 그냥 '애비(Abbey)' 라고 부른다. 애비가 특수한 교회라는 것은 역대 임금이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져왔다는 사실이고, 왕실의 중요 혼사 역시 여기서 거행된다는 것이다. 애비는 웅장한 미관이 세계적이다. 길이 1백56m 너비 61m 그리고 높이 31m이니까 규모에 있어서도 세계적이다. 특히 서쪽 정문 위의 2중탑은 볼수록 장중하기 비길 데 없다. 애비 안은 벽면이나 바닥 할 것없이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묘비요, 기념비다. 정문에 들어서 몇 발자국 가면 녹색 대리석에 새겨진 처칠경의 기념 석판이 있다.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remember winston churchill)'의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 '여왕과 의회의 뜻에 따라 수석 사제와 수사는 1965년 9월 15일 영국의 전투 25주년을 기하여 이 돌을 이곳에 안치한다'고 적혀 있다. '영국의 전투'란 제 2차대전 초기를 말한다. 애비에 묻혀 있는 것은 각계각층, 영국 역사에 찬란한 빛을 뿌린 위인들이 묻혔거나 또는 '기념'되고 있다. 처칠 기념비석의 왼쪽에 애틀리, 맥도날드, 베빈 등 노동당 및 노동운동지도자의 기념비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몇 발자국 더 가면 아프리카 탐험가요 기독교 전도에 심혈을 기울인 리빙스톤의 묘가 나타난다. 좀더 가까이 들어가면 성가대석 오르간 왼편에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묘비, 좀더 들어가면 노예해방의 선구자 윌바포스의 이름이 보인다. 애비는 흔히 보는 장방형의 그런 단순한 성당이 아니다.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십자형으로 뻗는다. 제단의 좌측, 그러니까 북쪽 입구까지는 대영 제국을 건설했던 대재상들. 피트, 파마스톤, 카닝,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톤, 피일 등의 기념비가 몰려 있다. 그러나 아마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제단 남쪽 입구 일대에 있는 '시인의 코너'가 아닐까. 여기에는 영문학을 빛낸 시인 작가를 비롯하여 예술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영문학의 원조 초오서의 묘비를 비롯하여 롱펠로우, 블레이크, 드라이든, 바이런, 밀턴, 엘리어트, 그레이, 존슨 박사, 세익스피어, 워즈워스, 골드스미스, 키플링 등의 묘비, 기념비 아니면 석상이 모셔져 있는가 하면 개릭(연극인), 아빙(연극인), 헨델(음악가)등의 이름도 보인다. 이곳은 1997년에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장례식이 치러진곳으로도 유명하다. 위 사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서쪽 정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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