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조지아주 선교 (Trinity Methodist Church, Wesley Monumental Church, Savannah, 세인트 사이먼스섬)[3]

존 웨슬리 조지아주 선교 (Trinity Methodist Church, Wesley Monumental Church, Sav…

디케DIKE 1 84

지금은 장로교회 목사관이 되었지만 이 건물은 1812년 감리교회가 구입했던 첫 목사관이라고 한다. 여기에 처음 살았던 목회자는 당시 웨슬리 채플 건축을 담당했던 James Russel 목사님이다. 이 처음 사택자리는 웨슬리 채플이 있던 곳 바로 뒤였다고 한다. 사바나의 첫 감리교회는 1812년 세워졌고 애즈베리(Frances Asbury)에 의해 1813년 성별되었다(consec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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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웨슬리 채플 자리 (목사관) 기념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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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of Tybee Island from Cockspur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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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of Tybee Island from Cockspur Island, 옛 부두

 

<세인트 사이먼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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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크라이스트 처치

 

세인트 사이먼스 섬으로 오게 된 찰스 웨슬리는 건강악화와 모함으로 빚어진 오글토프 장군과의 불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6개월 만에 이 섬을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의 그의 목회는 실패라고 평가될지 모르나 그 선교의 열매가 오늘날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http://www.christchurchfrederica.org/) 로 남아 있다. 찰스 웨슬리가 떠난 이후 존 웨슬리(1736-37년)와 휫필드(1737-38년)가 목회하였는데 당시는 예배당이 없어서 세 사람 모두 커다란 참나무(Oak) 아래서 설교하였다. 그 나무는 지금 아름드리가 되어 교회 앞에 서 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웨슬리 형제가 참나무 아래서 설교하는 모습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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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크라이스트 처치 스테인그 글라스, 참나무 아래서 설교하는 웨슬리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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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ley Oak   (출처-http://www.hmdb.org/marker.asp?marker=12370)

 

Christ Church 근처 도로를 지나다 순간적으로 "The Wesley Oak"라는 글씨가 눈데 확 들어와 차에서 내려 달려가 찍은 사진이다. 이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참나무'가 서 있는데 찰스 웨슬리는 이 섬에 도착해서 맞은 첫 주일에 그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했다. 그 날 20명 가량이 모였는데 그 중에는 오글토프(Oglethorpe) 장군도 있었다. 일년 후, 휫필드가 런던 주교로부터 사바나와 프레데리카의 목회자(Deacon)로 임명 받았다. 1737년 8월 8일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저녁에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예배드리고 두 번째 성서일과(lesson)를 설명하였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수가 모였다." 오랜동안 웨슬리 참나무라고 지목받았던 나무에서 만든 나무십자가가 크라이스트 처치 강단 가까운 벽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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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ley Oak   (출처-http://www.hmdb.org/marker.asp?marker=1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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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ley Oak   (출처-http://www.hmdb.org/marker.asp?marker=1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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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ley Oak   (출처-http://www.hmdb.org/marker.asp?marker=1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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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크라이스트 처치 웨슬리 기념비

 

Christ Church 정문 맞은 편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웨슬리 형제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웨슬리 형제가 세인트 사이먼스 섬(St. Simons Island)에서 목회했던 것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프레데리카 요새(Fort Frederica)가 있다. 웨슬리 당시 미국을 통치하던 영국은 스페인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조지아, 세인트 사이먼스 섬을 방어기지로 삼았고 오글토프(Oglerthorpe) 장군의 지휘아래 프레데리카에 요새를 세운다. 웨슬리 형제는 이 때 함께 영국에서 온 이주민들을 목회하게 되는데 1736년 조지아에 도착한 후 존 웨슬리는 사바나(Savannah)에 찰스 웨슬리는 약 75마일(약 120Km) 남쪽으로 떨어진 이 곳 세인트 사이먼스 섬에서 목회하였다. 기념비에 있는 내용을 옮겨 본다. 

TO THE GLORY OF GOD AND IN MEMORY OF THE REVEREND JOHN WESLEY 1703 - 1791 AND THE REVEREND CHARLES WESLEY 1707 - 1788  하나님께 영광을 또한 존 웨슬리 목사(1703-91)와 찰스 웨슬리 목사(1707-88)를 기억하며.

THE REVEREND CHARLES WESLEY, M.A. CHRIST CHURCH COLLEGE, OXFORD PRIEST OF THE CHURCH OF ENGLAND FIRST MINISTER AT FREDERICA OGLETHORPE'S SECRETARY FOR INDIAN AFFAIRS 1736 LEADER IN THE EVANGELICAL REVIVAL AS A CHRISTIAN HYMN WRITER HE IS UNRIVALED   찰스 웨슬리 목사는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영국국교회의 사제였다. 그는 프레데리카의 첫 목회자로 또한 인디언사무국의 총무로서 오글토프 장군을 돕기 위해 1736년 이 곳에 왔다. 그는 부흥 운동의 지도자 였으며 찬송작가로서 비길 데 없었다.

THE REVEREND JOHN WESLEY, M.A. FELLOW, LINCOLN COLLEGE, OXFORD PRIEST OF THE CHURCH OF ENGLAND APPOINTED MISSIONARY TO THE COLONY OF GEORGIA FEBRUARY 1736 TO DECEMBER 1737 MINISTERED on OCCASION AT FREDERICA FOUNDER OF METHODISM LEADER IN THE EVANGELICAL REVIVAL

존 웨슬리 목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 교수로 봉직했으며 영국교회 성직자 였다. 조지아 선교사로 임명되어 1736년 2월부터 1737년 12월까지 사역했고 페레데리카에서 때때로 목회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요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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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Moore Museum & Library

 

문을 열고 들어 서면 존 웨슬리의 동상이 서 있다. 한 손은 성경을 한 손은 초청의 의미겠지요. (이 사진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옮겼다. 뒷 배경이 옛날 모습이네요. 왼쪽에 있는 그림은 존 웨슬리 연애담의 주인공 소피아 홉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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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Moore Museum & Library 

Wesley Monumental Church in Savannah Georgia(1902)     (출처-http://www.panoramio.com/photo/34223734)

 

 

어린이들이 박물관을 방문했다. 미국 초기 감리교회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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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홉키

 

조지아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서, 존 웨슬리는 18세 소피아 홉키(Sophia  Christiana Hopkey)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이 로맨스는 거의 1년간 계속됐지만 존의 오해로 끝나게 되는데 그는 '제비뽑기기(the casting of lots)'로 소피아 홉키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결정해버렸다. 이 그림을 그린 Mary Green은  존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는 동안(오른쪽 하단), 소피아는 둘의 관계가 끝났음을 깨닫고 수심에 잠겨 슬퍼하는 소피아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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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Epworth By The Sea

 

감리교 수양관 Epworth By The Sea는 웨슬리 정신을 이으려는 비전을 가지고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와 박물관, 도서관까지 갖춘 이 섬의 landmark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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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사이먼스 섬  Epworth By The Sea 로비 그림

 

Red Lion Inn Market Cross에서 설교하는 웨슬리 Old Rectory 말 탄 웨슬리 St. Andrew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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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Gottlieb Spangenberg (스팽겐베르크 목사)

존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모라비안교 목사

 

존 웨슬리 형제의 북미 대륙 선교(조지아 주)


존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 선교를 감리교회 탄생의 제2기라고 회상하였다. 조지아 선교는 존 자신의 일기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두 형제의 저작물이 다수 전해지기 때문에 감리교 역사에서 기록으로 가장 잘 남겨진 기간이다. 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 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1736년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그는 미국으로 항해하여 가던 중에도, 미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에도 두 번씩이나 풍랑을 만나 항해를 하면서 파란만장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항해에서는 모라비안 교도들은 없었으나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고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여전하였다. 아메리칸 인디안들을 구원시키러 미국을 갔지만 자신마저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으로 가던 중에 만났던 풍랑과 모라비안들의 태도는 그의 영적 진보와 성장에 큰 자극을 준 사건이었다. 존은 시몬스호(the Simmonds) 안에서 일상적인 예배를 인도했을 뿐 아니라 ‘작은 경건회’라고 부를 수 있는 헌신적인 모임을 제안하여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영성수련에 힘썼다. 선상에서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게 된 것은 존에게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다. 시몬스 호는 갑자기 대서양 한 가운데서 침몰될 정도의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평안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침착한 행동은 목숨을 잃어버릴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던 존 웨슬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기도 후에 오글도르프와 2-3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에 조용히 복종할 것을 서로 확신하면서 이 긴급한 사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홀로 기적을 행하시고, 그의 백성을 능력 있게 구원하실 수 있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복되시다. 7시에 나는 독일인들(모라비안)에게로 갔다. 얼마 안 있어서 나는 그들의 행동이 매우 진지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영국인들 중 어느 누구도 떠맡기 싫어하는 다른 여행객들을 섬기는 일들을 기꺼이 실천하는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마음이 자신감을 갖는 데 좋다’고 믿고 있었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자신들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주셨다’고 고백하면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봉사하였다.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은, 곧 그들의 온유함을 보여줄 기회가 되었다. 떠밀리거나, 매를 맞거나, 내팽개쳐져도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슬며시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한 마디 불평도 없었다. 그들이 자만이나 노여움이나 복수심을 모두 극복하였던 것처럼, 공포심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지 시험할 기회가 왔다. 그들이 예배를 시작해서 시편을 낭독할 때, 바닷물이 뒤덮이고, 큰 돛이 조각조각 찢어졌고, 큰 바닷물이 우리를 이미 삼켜버릴 듯이 갑판 위로 쏟아졌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는 ‘아니요,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한 번 ‘하지만, 당신들의 부인들과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부드럽게 ‘아니요, 우리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을 떠나서 울부짖고 전율하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나는 담대하게 그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말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12시에 바람이 그쳤다. 이날은 내가 본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이것이 모라비안의 경건에 대한 존의 첫 번째 경험이었고, 훗날 ‘확신(assurance)’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

1 Comments
디케DIKE 2023.11.18 15:00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는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겐베르크 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 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 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각케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웨슬레는 4명의 자녀를 둔, 전 남편의 상속재산이 많은 Molly Vazeille 이라는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웨슬레가 다쳤을 때에 그 집에서 치료를 받은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웨슬레가 결코 그녀의 재산이 탐이 나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웨슬레는 그당시 이미 48세의 노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였고 심한 의부증을 갖고 있어 이미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후에 그녀는 먼저 죽게된다. 그러나 그의 조지아 선교는 반드시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으며, 여러 면에 있어서 많은 유익을 끼쳤다. 뒤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겸비한 마음과 굳건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한 점이라든지, 휫필드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유력히 일할 수 있는 충동을 준 것이라든지, 뒤에 오는 카톨릭 선교사를 선도하여 북미 대륙에 동 교회를 설립함에 실패가 없게 한 점 등은 웨슬레의 선교가 끼쳐준 공헌이다. 이 밖에도 새로운 영적 경험을 토대로 한 깊고 넓은 신학이 나타날 준비가 또한 이 때에 예비되었던 것이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 영국행 범선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없다


 

사바나 Trinity Church (1848) Historical Statement



John Wesley arrived in Savannah in 1736. He immediately began his avowed tasks of teaching and preaching. His brother, Charles, went south to Frederica on St. Simon’s Island to minister. Disappointment and frustration hampered Wesley at almost every turn.  Oglethorpe denied his plea to minister to the Indians.  His efforts to help his brother at Frederica failed.  He fell in love while traveling to America but was dissuaded from marrying by close friends.  Relatives of the young lady posted false charges against him.  The charge was that he refused to administer Communion to her.  However, she had failed to give him the required notice according to the laws of the Church of England. While under orders of arrest he gave notice to all concerned that he intended to leave America immediately.  He left without hindrance on December 2 1737. George Whitfield, a great English evangelist, arrived in Savannah only a short time after Wesley left. Wesley had written him pleading for help.  Whitfield found a strange “state of affairs here.” He wrote: “His name is precious among people. He has laid a foundation that I hope neither man nor devil will ever shake.” Whitfield took up Wesley’s ministry and enjoyed great success for a number of years.  Gradually Methodist “Societies” began to be organized in homes and shops.  A military map of Savannah of 1779 shows a meetinghouse of The Methodist Society on the corner of what is now State and Hambersham Streets.  Cornelius Winter preached here in 1769. Bishop Fancis Asbury visited Georgia twenty times. In 1784 Asbury sent Jesse Lee to “The Savannah Circuit.”  Others who preached in Savannah were: Hope Hull, Richard Ivy, Beverly Allen, Thomas Humphries, John Majors, Phillip Matthews and Samuel Dunwoody.  James Russell was appointed to Savannah in 1812.  Under his leadership Wesley Chapel was constructed on the corner of Lincoln and East Oglethorpe Avenue.  Completed in 1813, this “Good, neat house” had a congregation of thirty white and thirty-five black members.  As the congregation grew , a larger building became necessary and the Wesley Chapel congregation changed their name to “Trinity”. The cornerstone of Trinity Church was laid February 14, 1848.  The land had been the garden of the Telfair Family.  It was purchased for the sum of $8,500.00, a large investment in those days.  The sanctuary, a pure example of Corinthian architecture, and a one-story educational building were constructed at a cost of $20,000.00. The building was completed in the fall of 1850. The solid masonry walls are “Savannah Gray Brick” finished with stucco. Virgin long-leaf Georgia pines were hand hewn for the framing, flooring, and wainscoting.  The boards were cut to the taper of the tree and fitted together. The interior of the sanctuary, similar in design to the Wesley Chapel in London, England, was fully restored in 1969. The present Educational Building was constructed in 1927, and completely rebuilt after the great fire of 1991. John Wesley once referred to Savannah as the scene of the “second rise of Methodism”.  As the first and oldest Methodist church in the city, Trinity holds a unique place in the development of both American and World Methodism

사진, 글 출처- http://cafe.daum.net/wesleycollege, 원문 http://www.wmcarey.edu/carey/wesley/wesle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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