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Hanham Mount, Bristol

존 웨슬리의 Hanham Mount, Brist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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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 front of Bristol Cathedral      (출처-http://en.wikipedia.org/wiki/Bristol)

 

이 곳은 웨슬리를 열광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야외 설교를 반대했던 비숍 버틀러가 목회했던 곳이다.  이 교회는 300×69×52(인치)이고 탑이 127인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이런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담임하던 버틀러가 초라한 단 하나를 놓고도 몇 만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던 웨슬리를 견제했던 일을 생각하며 비교하니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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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von Gorge, home to several unique plant species     (출처-http://en.wikipedia.org/wiki/Bristol)

 

브리스톨의 명물, 서스펜션 브리지(Suspension Bridge)에 올라가면 브리스톨의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웨슬리 당시 브리스톨은 노예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노예를 수송하던 항구, 매매시장, 노예를 감독하던 곳, 말을 듣지 않는 노예를 밀어 버렸던 절벽 등 아픈 역사의 흔적이 많다. 노예도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며 소외 받는 이들을 향하여 열심히 목회하고 전도했을 웨슬리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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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on Gorge & Dock  당시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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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stol Bridge seen across the harbour            (출처-http://en.wikipedia.org/wiki/Brist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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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el's Clifton Suspension Bridge.            (출처-http://en.wikipedia.org/wiki/Bristol)

 

브리스톨로 통하는 이 강으로 수많은 노예들이 잡혀왔다. 웨슬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러하였다. 악한자들이 이 강을 노예를 들여 오는 것에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은 이 강을 통하여 당신의 복음의 사역자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좌측 바위절벽에 있는 동굴과 울타리는 말을 듣지 않는 노예를 밀어버렸던 곳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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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Hall, the seat of local government            (출처-http://en.wikipedia.org/wiki/Brist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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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강과 선착장

 

에즈버리와 토마스 콕이 복음을 위하여 떠난 필이다. 우리 생각에 어떻게 저렇게 작은 곳에서 배가 갈 수 있을까 생각 할 수 있지만 물이 들어오면 저 곳의 높이는 12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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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강과 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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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College Bristol    (출처-http://wesley.bandstandpreview.co.uk/index.html)

 

학교 식당에는 웨슬리 당시에 그린 존 웨슬리 초상화가 걸려 있다! (수잔나 웨슬리의 초상화 원본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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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College Bristol    (출처-http://methodist-presandvp.blogspot.kr/2010/05/wesley-college-bristo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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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College Bristol    (출처-http://methodist-presandvp.blogspot.kr/2010/05/wesley-college-bristo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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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College Bristol    (출처-http://methodist-presandvp.blogspot.kr/2010/05/wesley-college-bristo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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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ley College Bristol    (출처-http://methodist-presandvp.blogspot.kr/2010/05/wesley-college-bristo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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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칼리지 역사자료 도서관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회의 원자료들을 보게 되었다. 웨슬리의 준회원 안수 및 정회원 안수 증서, 수잔나의 사도신경강해 친필 노트, 존 웨슬리의 친필 속기 일기, 찰스 웨슬리의 친필 일기 등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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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ham Mount    (출처-http://www.panoramio.com/photo/7577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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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ham Mount    (출처-http://cafe.daum.net/bristolchurch/ER/21?)

 

이미 영국은 복음주의 자들에 의해 야외설교가 있었다. 하이처치(형식을 지키는 것에 보수성이 강한)틀에서 목사가 된 웨슬레에겐 늘 교회안에서 예배와 설교에 권위를 가지던 당시의 성공회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죠지 휫필드와 함께 옥스포드에서 메소디스트로 활동하던 웨슬리는 그가 활동하던 브리스톨에 가난하고 나약한 자들을 위해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감리교의 특징의 하나인 야외 설교를 하게 되는 계기가 이곳 하남(Hanham Mount)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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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웨슬리 야외 설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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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웨슬리 야외 설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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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옥외설교


옥외 설교는 18세기에 대중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당시 교회가 갖지 못한 기동성을 주었으며 교회에 수용 불가능한 수의 대중을 불러왔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남루한 옷과 때 묻은 몸으로 예배 장소에 감히 찾아 올 수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과 만나게 하였다. 만일 민중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 길 밖에 없었다. 그 대가가 얼마이던 간에 그 과제는 성취되어야 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 일을 위해 하느님의 선택 받은 그릇이었다. 옥외 설교는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은 방법이었다. 당시 산업 혁명의 풍조는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는 교회나 성직자 없는 공장 지대와 도시 외각 지대가 무수하였다. 기독교의 기본 요소들을 무시하는 세속주의도 만연하였다.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과감한 제도적 개혁이 필요한데 그것은 교회의 기본 구조를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非) 국교도 시대적 책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소외된 영혼들을 추수할 막중한 사명이 웨슬리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이제 웨슬리는 야외 설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향후 50년을 위한 선교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순회 전도자로서 옥외와 임대 건물, 그리고 간혹 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1739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 약 500회 설교하였는데 교회에서 한 것은 불과 8회이었다고 한다. 회중은 날로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의 일기는 기록하기를 보올링 그린과 로즈 그린에서는 회중이 7천명에 이르렀고 런던에서는 휘트필드와 함께 1만 2천-1만 4천의 회중에게 설교하였다고 한다. 웨슬리는 옥외 설교의 가치와 효력을 크게 인정하였다. 그는 그것의 효과와 편리함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773년 그는 무어필즈에서 기록상 가장 많은 회중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의 음성이 컸기 때문에 끝머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는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야외 설교의 시대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죄와 혈기 가운데 머므르는 동안 그것은 효과적일 것이다." 야외 설교라는 비전통적인 방법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웨슬리는 그것에 대하여 변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745년 "이성 및 종교인에 대한 호소"란 글에서 그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그는 교회의 사용이 금지되기 전까지는 옥외에서 설교할 의도가 계획은 없었다고 항다. 그것은 다만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고 선택한 '긴급 조치'에 불과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동기는 두 가지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자기에게 위임되었으므로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 속에서 죽음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애원을 들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생소한 길"인 옥외 설교가 오직 자기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는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는 뒤늦게 1772년 9월 6일자 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오늘날까지 야외 설교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사명을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이 이것 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출처 : 브리스톨연합교회, 글쓴이 : Good모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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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화이트필드  (출처-sola-gratia,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 웨슬리스토리(조선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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