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사원


웨스트민스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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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영어: Collegiate Church of Saint Peter at Westminster)는 간단히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라고 잘 알려진 이 사원은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공회 성당이다. 서쪽으로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영국 국회의사당)과 인접해 있다. 전통적으로 이곳은 영국 왕의 대관식 등 왕실 행사를 거행하거나 매장터로 이용하는 곳이다. 부근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은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으로 이곳 사원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1066년 해럴드 2세와 윌리엄 1세 두 왕들의 대관식 이후로 모든 잉글랜드와 영국의 군주들(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은 에드워드 5세와 에드워드 8세 제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헨리 3세는 프랑스의 왕자 루이가 런던을 장악했기 때문에 런던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없었다. 그래서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는데, 교황은 이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중에 1220년 5월 17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다시 한 번 거행하였다. 겨우 9일 동안 통치하였던 제인 그레이는 대관식을 결코 치르지 않아 합법성이 의심스러웠다. 대관식은 전통적으로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관한다. 사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에드워드 왕의 어좌(또는 성 에드워드의 왕좌)는 영국 왕위 계승자들이 대관식 직후 착석하는 목재 의자다. 또한, 1296년부터 1996년까지 어좌 밑에 스코틀랜드의 역대 왕들이 즉위할 때 앉았던 스콘의 돌(스콘석)을 놓아 두었으나, 지금은 대관식이 다시 거행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 가 있다.

개신교의 분파 중 하나인 장로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 중 하나. 장로회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세워지기 이전, 영국성공회 내부 장로파들이 39개 신조가 충분히 종교개혁적이지 않다고 인식하여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만든 신조이다.

영국 청교도 혁명과 영국 내전 당시, 의회파 주류였던 국교회[1] 장로파 젠트리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신학자들을 소집하여 장로회의 신앙의 기본 틀을 정립하기 위해 만든 문서로, 현재까지도 전 세계 장로 교회 신앙의 핵심 문서로 인정받는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사도신경 등 신경과는 성격을 달리하여[2], 총 33장짜리 아주 긴 문서가 되었다.

종교개혁 시기 영국국교회[3]의 장로파들은 국교회가 더 확실히 가톨릭을 배척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4] 특히 당시 국교회에서 만든 39개 신조에서 가톨릭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것이 그들 눈에는 불충분해 보였다. 그래서 1643년 장기의회의 요청에 의해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담당할 범국가적인 교회 총회가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인 장로파 개신교인들이 성공회 39개 신조 보다 더 적극적으로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신조의 작성 작업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로회의 마지막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다. 이때 함께 만들어진 문서로는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예배모범, 그리고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등이 있으며, 이 작업을 진행한 모임을 웨스트민스터 총회라고 부른다.[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이런 배경에서 작성된 문서이니만큼 내용 중에는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성공회 39개 신조가 가톨릭의 일부 교리에 대해 정중(?)하게 반박하는 수준이라면,[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가톨릭 교리 전반을 신랄하게 까는 수준.

당시 청교도 혁명과 영국 내전당시 왕당파에 국교회의 전통주의 계열(오늘날의 성공회 고교회파)이 많았고 잔존하던 가톨릭 교도들도 많은 데다가 국왕 찰스 1세의 가톨릭 관용 정책과 고교회파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종교재판[7] 및 친가톨릭 대외 정책에 학을 뗀 개혁주의자들이 많았기에 39개 신조보다 더 가톨릭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대륙에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스페인식 종교재판, 네덜란드 독립 전쟁, 30년 전쟁시기 가톨릭군의 마그데부르크 학살 등으로 개신교인들의 가톨릭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8]

한편 제정 당시 열심히 왕당파를 때려잡던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파 젠트리들의 주류인 장로파가 아니라 독립파(회중파)였다. 당시 장로파는 영국국교회를 자신들의 주장에 맞추어 쇄신해야 한다는 쪽인 반면에, 독립파는 영국국교회의 내부 개혁을 포기하고 완전히 별개인 새로운 교회[9]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소수파였다. 내전 이후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개신교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정작 장기의회가 추진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은 장로파가 주류였다는 이유로 정책에서 배제해버린다. 이후 회중파(독립파)의 대부분은 왕정복고로 인해 대부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신대륙으로 이민을 가서, 청교도들의 주류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든 영국의 의회파 주류(장로파)와 북미로 넘어가 자신만의 순수한 신앙을 지켰던 청교도(독립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꽤 큰 간극이 존재한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영어: Westminster Cathedral) 또는 웨스트민스터 주교좌 성당은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성당이다. 19세기 후반에 건립되어, 1903년 봉헌되었으며, 비잔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의 대성당이며, 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이다. 부근에 있는 성공회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을 한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의 대성당을 잘 구별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은 칼뱅주의 신앙을 담고 있는 개신교의 신앙고백이다. 개혁교회의 중요 문서 또는 신조(Creed)로 많이 채택되는데, 현재 한국 장로교에서도 사도신경,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등과 더불어 칼뱅주의 전통을 따르는 개신교(장로교회, 개혁교회 등)의 중요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다. 신도게요서라고도 불린다.

원래의 취지는 39개 신조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였으나 오랜 기간의 논의와 담론을 거쳐 기독교 역사상 가장 명확하게 설명된 신앙고백서를 완성하였다.

1643년 영국 의회가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와 의회와의 내란(청교도 혁명)중에 영국 교회가 공통으로 따를 수 있는 전례, 교리, 권징 등의 기준을 수립할 필요를 느끼고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 총대들과 의원,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학식있고 거룩하며 분별력 있는 신학자들"이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모였고, 이 회의는 5년 동안 지속되었다. 회의의 결과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는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 신앙고백서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또한 작성되었으며 이듬해 1648년 영국 의회에서 공인되었다.

이 문서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미국 장로교회(PCUSA)의 교리적 표준문서로 인정되었고, 한국에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 한국 장로교 교회의 표준문서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연합장로교회(UPCUSA)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포기하고 카를 바르트의 화해신학적 교회론을 구성하는 신정통주의 신조인《1967년 신앙고백서》를 발간함으로써 신정통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신정통주의(자유주의 신학과 다름) 신앙고백을 천명했다.

교회일치에 반하는 내용도 있는데, 이 때문에 현대적 신학과는 거리가 생긴다. 일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조 '교회에 대하여' 6항은 로마 가톨릭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못박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다. 로마 교황도 또한 결코 그 머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이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 일컫는 모든 것에 대적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이다."

There is no other head of the Church but the Lord Jesus Christ. Nor can the Pope of Rome, in any sense, be head thereof; but is that Antichrist, that man of sin, and son of perdition, that exalts himself, in the Church, against Christ and all that is called God.

(평가)

윌리엄 윌리엄스의 편지에서 그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성경 옆에 반드시 이 신앙고백서를 두고 반복해서 공부를 하라고 권면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한 고백서가 사도신경 이후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송하였다.

찰스 해돈 스펄전은 침례교 고백서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 고백서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가장 가까이 따른다고 주장하였다.

토머스 F. 토렌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페더럴 신학을 도입하여 매우 율법적이며 헌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경직고 논리적인 정확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하였다.[4]

존 밀턴은 회의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총회를 '선택받은 총회'였으며 매우 경건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모임으로 평가하였다.

필립 샤프는 프로테스탄트 공의회 중에 그들의 노고와 향후 세대에 끼친 영향면에서 가장 최고로 평가하였다.

(영국 장로교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영국 장로교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여부에 따라, 채택하는 자들과, 채택을 안한 자들과, 중도성향으로 세 부류로 나뉘었다.

영국 장로교의 역사에 대한 전문가인 드리스데일은 그의 저서에서 채택을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결과들에 대하여 비참하다고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채택을 하지 않은 결과, 교회들이 자유의 방종으로 다른 교리들을 받아들여 심지어 로마 가톨릭과 같은 형태로 변질되었으며, 아리우스파로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장로교에서 채택한 교단)

1982년 미국장로교단 (PCA)은 10번째 총회에서 이 신앙고백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8] 이 채택의 용도는 노회, 당회, 집사회의 학습용이었다. 이것은 1729년의 채택안을 연장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연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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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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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센트롤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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