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의 예언적 행동들(겔 4:1~17절)

에스겔의 예언적 행동들(겔 4:1~17절)

디케DIKE 0 1886

에스겔의 예언적 행동들(겔 4:1~17절)

4장부터 본격적인 에스겔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역 기간은 27년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사역은 예레미야처럼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상징적인 행동들로 예언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특히 4~24장은 B. C. 586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주어진 예언입니다. 당연히 이 시기의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귀족들과 기술자들 유력한 사람들은 누구도 예루살렘 멸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언해야 했던 에스겔의 예언적 행동이 4장과 5장에 네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4:1~3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포위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4:4~8은 포로 기간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4:9~17절은 예루살렘에 닥칠 기근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5:1~4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 됨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마지막으로 5:5~17은 앞선 네 가지 상징적 행동들에 대한 설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어긴 자들에 대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4, 5장의 내용은 앞으로 4~24장에 걸쳐 전개될 남 왕국 유다를 향한 심판 예언의 서론적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6년 후 예루살렘(4:1~3절)

4장에서 첫 번째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적 행동은 토판을 가져다가 앞에 놓고 예루살렘을 그린 후에 그 성읍을 에워싸고 사다리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개역 성경은 토판을 박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토판은 오늘날 벽돌같은 것으로 당시 바벨론 건축에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공성퇴란 히브리어 ‘카림으로 우람한 수양이나 염소 또는 그런 짐승들이 가진 큰 뿔이라는 독특한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나중에는 커다란 기둥 끝에 금속을 부착하여 이를 성벽이나 성문에 부딪치게 하여 부수는 병기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성문을 깨트리기 위해 긴 기둥을 마차에 싣고 돌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형이지만 예루살렘이 공격 당하는 생생한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입니다.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징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형은 B. C. 586년에 있을 바벨론의 포위, 공격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 함락과 유다 왕국의 철저한 멸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말이 아닌 이런 모형적 행위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고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까? 뒷날 이 모형은 하나님의 예언이 분명하게 성취되었다는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후에라도 유다 백성들에게 에스겔이 토판 위에 그린 그림을 보고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도록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겔의 모형을 통한 예언이 바벨론 3차 침공 때 현실이 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에스겔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매국노로 비춰지고 얼마나 많은 질시를 받았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더구나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희망을 포기하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예언이었는지 모릅니다.

왼쪽으로 삼백구십일, 오른쪽으로 사십 일(4~8절)

이스라엘 백성이 390년 유다 40년의 죄악의 세월을 에스겔 선지자는 눕는 날 수대로 죄악을 담당하는 예언적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하루가 1년이라고 설명하시면서 390일은 죄악의 날들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 나타난 숫자입니다. 6절에 의하면 하루는 일 년으로 계산되므로 삼백구십일은 삼백구십 년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왕국의 존속 기간은 남북 왕국이 분열된 B. C. 930년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점령된 B.C.722년까지이므로 약 209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이 범죄한 햇수가 390년이라는 본서의 수치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자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LXX) 과 후기 히브리어 수정 사본들이 이 기간을 백 구십 일로 기록한 것을 채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수용한 190년이라는 수치 역시 옳은 것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390년과 다음절에 언급되는 유다가 받을 형벌의 햇수인 40년을 합산하면 430년이 얻어지므로 이 합산한 햇수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당했던 기간(출 12:40, 41)과 연관시키려 하기도 합니다. 즉 이 햇수는 남북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의해 받을 환난의 기간을 상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과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받은 것처럼 앗수르와 바벨론에서도 고난받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단의 학자들은 이 기간을 문자 그대로의 햇수로 보고 해석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범죄한 390년 이란 왕국이 분열한 때부터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바벨론에서 1차 포로 귀환 때까지의 기간인 약 390년을 지칭하며, 유다의 40년이란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B. C. 586년부터 북이스라엘과 같이 본국으로 돌아올 B.C.537년까지의 약 40년간의 기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가지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지 확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는 이 견해들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그 햇수가 아니라 이것이 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대행 고난(代行苦難)을 통해 하나님은 범죄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시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죄악의 날들이 긴 것은 사방에 눈이 달린 여호와의 감찰하심이 북이스라엘이 세워진 이래로 금속아지를 우상으로 제시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온갖 우상의 천국이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남 유다보다 월등하게 많은 날수가 환난과 시련의 기간으로 작정 된 것은 북이스라엘이 남 유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 범죄하고 악을 자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 때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마지막 왕(19대)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반면 남유다 는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등 여러 선한 왕들이 등장하여 종교 개혁을 하며 범국가적인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심판의 날들은 길지 않게 책정된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7절은 또 이상한 말씀을 합니다. “너는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라는 것입니다. 팔을 걷어 올린다는 것인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자세가 아니라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을 걷어 올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언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방관자와 같은 소극적 자세로 전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로 전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8절에서는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에스겔이 줄로 동여졌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계속해서 속박하셔서 그가 고통을 겪도록 만드시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에스겔의 예언적 행동은 장차 이스라엘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에스겔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말씀을 전하는 삶이 이렇게 고통을 동반한다는 성령의 음성도 듣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삶은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고통스럽고 더 나아가 행동으로 예언을 보여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 걸어가는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너무 편하게 목회하는 것은 아닌지....

예루살렘 극심한 기근에 대한 예언(9~17절)

앞 단락인 4~8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 기간에 대해 예언하며 죄의 경중에 따른 심판 정도의 차이를 가르친 선지자는 이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 임할 기근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면 바벨론 3차 예루살렘 침공 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으며, 그 결과 외부로부터 식물의 반입이 중단되어 엄청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아름다운 옷을 업은 귀부인들조차도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자녀들을 삶아 먹는 참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참상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이었습니다(렘 4:3, 4).

에스겔 선지자는 그런 상황을 지금 미리 자신의 행동을 통해 예언해야 했습니다. 9절입니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그럽니다. 여기 기록된 곡식들 가운데 밀은 비교적 상류층이 즐겨 먹는 곡식이었으나(신 32:14; 렘 12:13) 다른 곡식은 기피되는 식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콩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 하층민들이 주식으로 하던 렌즈콩이며 조는 길고 둥근 모습을 한 갈색 곡식으로 쌀과 유사하나 귀리 등과 함께 질이 낮은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곡식들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식량이 극히 모자랄 때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은 여러 곡물을 섞어서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레 19:19; 사 22:9~11). 따라서 에스겔이 행하여야 할 행위는 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때 예루살렘 성 내에 극심한 식량난이 있게 되어 곡식의 종류를 따지지 않고 먹게 됨은 물론 율법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혼합식을 먹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0절은 그것도 넉넉하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10~13절입니다.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그럽니다. 곡식이나 떡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측정해 가면서 먹어야 한다는 자체가 극심한 기근을 연상하게 합니다. 한편 한 세겔은 11.4g이므로 20세 겔은 228g에 해당합니다. 아주 적은 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인이 하루 먹는 식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히 적은 양입니다. 더욱이 9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질이 낮은 떡으로 이 정도의 양을 배급받아 연명한다는 것은 후일에 있게 될 예루살렘 성의 기근이 얼마나 심할 것인가를 암시해 줍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물도 충분치가 않습니다.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고 합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계란 72개를 깨서 합한 양의 분량을 한 힌으로 계산합니다. 따라서 육분의 일 힌은 계란 12개 분량 정도의 적은 양입니다. 약 0.61 리터로 추정되는 이 분량의 물로는 사람의 몸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수분을 도저히 공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때에 사람들은 이 정도의 물을 20세겔의 곡식과 함께 배급받아 먹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앞으로 당할 이러한 처참한 미래를 지금 상정적인 행동을 통해 알리도록 명령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사역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 언어로 말해야 했던 에스겔의 고통과 아픔이 오롯이 전해지는 부분입니다. 거기다가 인분으로 불을 피워 보리떡을 구워 먹으라고 합니다. 가나안이나 아라비아 지방에서는 고대로부터 뜨거운 숯불로 떡을 구웠습니다. 그러나 때로 댈감이 부족할 때에는 소나 낙타와 같은 가축의 배설물을 말려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배설물인 인분은 이러한 가축의 배설물마저도 구할 수 없을 만큼 연료가 절대 부족하였을 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분은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므로(신 23:12~14) 인분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분 냄새가 밴 거칠고 맛없는 보리떡을 상상해 보면 본문의 예언은 하나님앞에 패역한 유다 백성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겔이 인분으로 떡을 구워 먹으라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에스겔 선지자의 삶이 어렵고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의 참상을 행동으로 예언하는 에스겔의 모습이 당시 포로로 잡혀온 유다 귀족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노아 시대에 오나를 비웃던 사람들과 같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16~17절은 이 예언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강대국인 바벨론 제국의 공격이 그 원인인 것처럼 보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으셨던 이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힘과 양식을 의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의뢰하는 것을 끊으시고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마시다가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 쇠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예언이 그대로 임했던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예스겔의 행동으로 전하는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라도 해서 포로로 잡혀 온 귀족들 유다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에스겔이 감당해야 할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냥 말씀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토판을 만들고 그 상황을 모형으로 제시하며 몸으로 죄악의 시간들을 말하고 심지어 먹는 것도 그 극단적인 상황을 실제로 재연해 내야 했던 에스겔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아무도 이해하거나 긍휼히 여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팔짱을 끼고 그 시대를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동일시의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레미야가 델아빕에서는 젊은 에스겔이 이렇게 치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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